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티브 맥퀸 (문단 편집) === 배우 데뷔 후 === 1952년에 뉴욕에서 연극 극단 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연기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무명 시절엔 연기만으로는 수입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오토바이 레이스 대회에 참가해서 입상하여 상금을 타가기도 했다. 1955년부터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후 헐리우드 영화에도 출연하면서 점차 스타로 떠올랐다. 같은 해 스타의 산실이었던 액터스 스튜디오에 [[마틴 랜다우]]와 함께 유이하게 합격해 훈련 받기도 했다. 1963년 라이프지는 스티브 맥퀸을 다음과 같은 칭찬으로 평했다. "잘난 체하는 [[제임스 캐그니|캐그니]], 텁털한 [[험프리 보가트|보가트]], 거칠게 다듬은 다이아몬드의 [[존 가필드|가필드]]를 겸비한 배우". 남자 중에 남자였던지 자연인으로서도 온갖 마초성을 내뿜었던 터라 뒷얘기가 상당히 많다. 첫째로는 미친 듯한 속도광에 운동광. 이는 아버지부터가 스턴트 운전수였던 만큼 핏줄에 흐르는 기질이었던 듯싶다. 모터사이클, 버기카, 스포츠카, 경비행기 등 다양한 것들을 모는 데 미쳐 있었고 소질도 있었다.[* 1970년 세브링 12시간 레이스에서 종합 2위를 차지했을 정도의 실력가였다.] 평생 오토바이 201대, 자동차 55대, 비행기 5대 등, 아무튼 질주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수집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동료 [[제임스 코번]]은 "커다란 장난감을 좋아했던 덩치 큰 [[어른이]]" 라고 했다 전해진다. 그러나 유명해지고 돈 많이 벌었다 하여 사치를 부린 사람은 결코 아니다. 사실 그는 이 특별한 취미 외에는 소문난 [[구두쇠]]로 유명했고, 또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인지, 불우한 어린아이들을 돕는 데 거금을 쾌척했던 사나이였다. 그의 영화들 중 하나도, 그의 카레이싱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듯한 영화로서, 스턴트 없이 위험한 장면들을 그가 직접 소화하며 혼신을 다해 찍은 《'''[[르망 24시|르망]]'''》이 있다. 본래는 실제 르망 레이스에 드라이버로 참전하려고 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극영화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영화 자체는 여러 곡절로 인해 망했다는 평을 듣지만.[*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대탈주]]에서 공연했던 [[제임스 가너]]가 카 레이싱 영화 [[그랑프리]]에 출연하자, 레이싱 선수라는 자부심이 있던 맥퀸이 엄청나게 열받았던 것.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맥퀸의 맨션 바로 아래 층에 가너가 살았는데 맥퀸이 가너의 베란다에 오줌을 쌀 정도였다고 한다. '[[그랑프리]]는 쓰레기다. 진짜 레이싱 영화가 먼지 보여주겠다'고 공개적으로 디스하면서, 레이싱 선수들을 불러들여서 영화를 찍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맥퀸의 완벽주의 성향이 제작기간과 제작비를 초과하자 인내심을 잃은 영화사가 감독을 갈아치우고 맥퀸을 배제하면서 서둘러 영화를 완성하다보니 어정쩡한 결과물이 나왔다. 촬영 중에도 플롯이나 결말이 완성되지 않아 각 결말에 맞는 장면을 따로 찍기도 했다. 그래도 레이싱 팬들에게는 지금의 헐리우드도 만들기 힘든 카 레이싱 영화라고 인정을 받는다고. 영화는 다른 얘기는 별로 없고, 내내 미친듯이 차만 몬다. 그냥 르망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거나 마찬가지. 직접 차를 몰면서 찍었으므로 땀과 먼지투성이에 피곤에 찌든 맥퀸의 모습은 연기가 아니다.] 하지만 레이싱 팬들에게는 거의 성역으로 취급받을 정도의 영화이며 오히려 르망의 실제 분위기와 지리함, 끔찍함 사이에 존재하는 약간의 영광을 추체험하는(...) 느낌을 받게 하는 영화이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이런 그의 레이싱에 대한 열망은 그의 수명을 깎아먹게 된다. 가장 큰 원인은 당시 방염복 재질로 쓰이던 석면이다.[* 물론 자동차 부속에 석면이 널리 쓰이고 있었던 건 사실이나 당시에는 이미 석면을 대체하는 재질의 방염복이 상용화된 지 오래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틀린 표현이다. 스티브 맥퀸의 경우엔 이보다 이른 군시절 단열재 교체 작업중 노출된 석면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두 번째로는 여성편력이 있다. 결혼과 이혼을 밥 먹듯 했고, 좀 더 나이 먹어서는 당시 잘나가던 영화 제작자 로버트 에반스의 아내였던 당대 최고의 스타 앨리 맥그로를 꼬셔 결혼에 성공한다. 둘의 결혼은 얼마 가지 못했다. 다음 부인이었던 바버러와는 1년밖에 살지 못하고 요절한다. 세 번째로는 오기에 가까운 자존심과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신인 시절부터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에, 자신의 비중을 당당하게 요구하곤 했다고 한다. 황야의 7인 출연 당시 이미 대배우였던 [[율 브리너]]보다 더 주목을 받고 싶어 그의 말과 총이 자기 것보다 눈에 잘 띈다고 지속적으로 투덜대며 시비걸다 율 브리너가 자꾸 그러면 모자를 벗겠다고 하자(율 브리너는 대머리 카리스마 배우의 정점으로 불린다.) 그제서야 멈췄다. 타워링에 함께 출연한 [[폴 뉴먼]]과의 라이벌 구도로도 유명했다. 후에 대성공한 이후로는, 오히려 쉬고 싶다며 쏟아지는 출연 요청을 모조리 거부하고 은거하기도 했다. 건방지다거나 오만방자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런 그의 자신감은 주변 많은 이들을 질리게 만들기도 했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출연 조건으로 대량의 물품을 공짜로 줄 것을 요구하는 기행(?)으로 유명했다. 대개 볼펜, 청바지, 일회용 면도기 같은 값싼 생필품이나 학용품 종류를 수십 상자씩 챙기곤 하여, 저 인간이 왜 저러나 하는 궁금증을 유발했는데 알고 보니 이 물건들을 한 소년원에 기증하고 있었다. 극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맥퀸 자신도 소년원 생활을 했고, 대성한 후에도 그 시절을 잊지 않았던 것. 꽤 나중에 다른 사람에 의해 알려진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